옛고양의 길목, 행주나루
강 건너에서 ‘사공’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노를 저어 건너가 나룻배로 강을 건네주던 나루터. 생각만해도 넉넉하고 푸근한 얘기 아닐까요? 한강에 아직 다리가 없었던 시절, 강 건너 장보러 가는 사람, 친정에 가는 새댁, 때로는 뱃놀이 나온 사람.. 나루터는 지금으로 치면 버스터미널에 해당됩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볼거리와 먹거리가 많았던 나루터. 1978년 행주대교가 건설되면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지금도 이곳엔 고양의 맛을 대표하는 음식점들이 생겨나 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적을 격퇴한, 유형장군묘
사성으로 둘러싸인 유형장군의 묘역은 총 30여 평의 규모로 봉분을 중심으로 석물이 갖추어져 있는데 봉분의 우측에 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봉분 앞으로는 상석과 향로석이 갖추어져 있으며 전방에는 좌우에 문인석이 있습니다. 신도비는 묘소 아래 길 옆에 있는데, 신도비의 두전에는 ‘'贈領議政 輔祚功臣 晋山府院君 諡忠景 柳公神道碑銘(증영의정 보조공신 진산부원군 시충경 유공신도비명)’이라 되어 있습니다. 류형(1566~1615)은 임진왜란 때에 크게 활약한 무인으로 그의 자는 자온, 호는 석담으로 정유재란 때 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왜적의 격퇴에 공을 세웠으며 1602년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며 시호는 충경이며 해남 민충사에 제향되었습니다. 장군의 묘는 현재 행신동 무원마을 진주류씨묘역의 길 건너편 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울을 오가던 교통로, 강매동 석교
현재 신도시로 개발된 행신지구의 동쪽 방향 끝에 경의선 강매역이 있습니다. 강매역의 남쪽에 봉대산 방향으로 가는 길 있는데 길을 따라 봉대산 아랫부분을 돌아가면 제방이 있습니다. 이 제방 위에서 행주산성 반대방향으로 비포장도로를 따라 50m정도 가면 다리가 보이는데 이것이 강매동 석교입니다. 강매동 석교는 옛날 고양의 일산, 지도, 송포 등 한강연안의 서부사람들이 서울을 오가던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다리였습니다. 다리의 기본구조는 네모진 돌기둥 18개로 교각을 만들어 세우고 그 위에 장방형 교판석을 깐 모습이며 교각과 교각 사이에는 6~7개의 교판석이 2열로 놓여있습니다. 다리의 전체적인 모습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 형태이며 가운데 부분이 양 옆보다 높아서 전체적으로 곡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1755년 영조연간에 발행된 『고양군지』에 의하면 당시에는 해포교라 기록하고 있으며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석교로서의 기록은 다리 난간에 음각된 ‘江梅里橋 庚申新造(강매리교 경신신조)’라는 기록으로 1920년대에 신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강매동 석교는 강매역, 행신동 소만마을에서 강매동 강고산 마을에서 하차해 창릉천변 강매동 석교로 진입이 가능하다. 고양시에서 조선시대의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고 유일한 전통교량비라는 점에서 문화유산로서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