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연혁
선사시대로부터 21세기 까지 이어지는 일산의 역사
지금으로부터 수만년 전, 우리 일산동구 지역에는 한강 주변과 고봉산 같은 낮은 구릉성 산지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주로 이곳 일산지역에서 이동생활, 또는 정착생활을 하면서 살았는데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편마암의 차돌을 이용하여 석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일산의 대화동과 주엽동 일대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의 볍씨가 발견되어,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로 곡식을 뿌려 논농사를 지은 곳임이 밝혀졌다.
이 볍씨들은 일산 신시가지가 개발되기 이전에 논과 밭을 중점적으로 연구한 토탄층 조사에서 밝혀졌는데 이곳에서는 이외에도 무문토기, 빗살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선사시대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점점 넓혀 점차 그 주변지역으로 확장하였다.
일산동구의 내륙지역인 문봉동, 사리현동, 지영동 등지에서 청동기 시대의 여러 가지 유물이 발견되었고 성석동, 설문동, 사리현동 등지에서는 마제석부 등을 비롯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역사시대의 초기단계인 삼국시대에 우리 일산동구 지역은 백제→고구려→신라 순으로 통치를 받게 되었다. 먼저 백제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후 일산지역을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막는 중요한 요충지로 활용 하였다. 고구려는 그 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에 이 지역을 점령한 후 약 80년동안 지배하였는데 이곳은 당시 달을성현(達乙省縣)으로 불리웠다.
그후 강력한 신라군의 반격에 의해 이 지역을 물려주고 고구려 세력은 한강 이북으로 철수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 이곳은 고구려, 백제, 신라 특히 신라와 고구려군과의 세력이 자주 충돌하곤 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세력하에 축조되어진 토성으로 성저토성이 있다. 이 성은 현재의 대화동 성저마을에 축조되었다.
높이 2~3m 길이 400m 정도의 거대한 토성으로 고구려의 토기를 비롯해 통일신라 시대의 토기가 발견되어 한강유역의 방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증명되었다. 그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신라 경덕왕 16년에는 고봉현으로 불리웠다.
911년 신라의 세력을 물리치면서 일산지역은 궁예의 태봉국이 되었으나 곧 왕건의 고려에 포함되었다.
고려시대에 일산은 이웃해있는 개성이 새로운 도읍지로 정해짐에 따라 문화·역사의 중심지의 주변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이곳은 남경유수관의 한부사가 관리를 맡았으며 1285년에는 명칭을 부원으로 고치게 되었으며 주엽동 일대는 특히 황조향이, 그리고 밤가시마을 부근에는 율악부곡이 설치되었다.
삼국시대 이후 줄곧 고봉과 덕양으로 나뉘어져 있던 고양지역은 조선 태종 13년(1413)에 두 지역의 앞자와 뒷자를 따서 고양(高陽)이 되었는데 지금의 고양이란 이름도 이때부터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 일산지역은 고려조의 도성이었던 개성과 새로운 조선왕조의 수도인 한성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역사의 중심지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성종연간인 1471년에 일산지역이 고양현에서 고양군으로 승격되었다.
연산군 시대에는 이곳 일산을 비롯한 고양땅은 금표구역내에 포함되어 왕의 사냥터와 유흥지, 목초지 등으로 이용되었다. 1755년 영조년간에 발간된『고양군지』의 당시 기록을 보면 고양에는 8개면, 3508호 남자 6785명, 여자 7076명 등 총 13,878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1895년 고종 3년에 한성부에 포함되었으며 1906년 양주군 신혈면이 고양땅에 속하게 되었다.
1911년 당시 9면 50개리를 관할했고, 1914년 군청소재지는 지금의 서울적십자 병원 자리에 위치했다.
이후 1936년 지금의 서울 동대문 운동장 야구장 건너편 자리에 군청이 위치했었으며 당시 고양땅은 지금 서울의 강북 대부분이 포함된 광활한 구역이었다. 당시 이곳 일산은 중면으로 불리웠다.
1980년 중면이 일산읍으로 승격되었고, 1989년 일산 신시가지 개발이 발표되었으며 92년에는 고양시로 승격되었고 1996년 3월 1일 덕양구와 일산구로 분구된 후, 2005년 5월 16일 일산구는 다시 일산동구와 일산서구로 분구되었다.
2022년 1월 3일 중산동을 중산1·2동으로 분동하여 12개 동이 되었다.
최종수정일 : 2022-05-20 10:2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