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관없는 사회에서 상관있는 사회로
우리는 산업사회 300년 동안 아마존의 밀림이 파괴되든 말든, 생물종이 멸종되든 말든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가난한 나라가 기후재난으로 고통받든 말든, 전쟁으로 죽거나 파괴되든 말든 역시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행동해 왔다. <상관없다>는 인식은 너와 나는 분리되어 있다는 사고이다. 인간과 자연은 나뉘어져 단절되었다는 사고이다. 나뉘어 분리된 개인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분리된 개인 자신의 이익과 승리를 위해 타인의 손해와 패배는 당연하며, 경쟁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잘못 사회 적용한 허버트 스펜서는 <사회진화론>을 주장하면서 사회도 자연과 같이 “약육강식, 생존경쟁”의 경쟁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는 식민지 지배는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오늘날 북유럽이 풍요로운 국가가 된 것은 바로, 식민지과정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의 자원을 채굴하고 빼앗았기 때문이며, 그곳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와 노예노동을 통해 이룬 풍요라는 것은 알사람은 다 안다.
성장사회에서 성숙의 사회로
<상관없다>는 것을 풀어보면 <서로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마존의 생물종의 멸종이 인간과 관계가 없는가? 이웃의 고통이 나의 행복과 정말 관계가 없는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의 급속한 감염을 통해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우리는 서로 관계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최근 수백 년간 자본주의 산업사회 근대문명은 이렇게 물리적 입자와 개인중심의 사고를 토대로 인간에 대한 경쟁과 대립, 자연에 대한 정복과 지배의 윤리로 풍요를 이루어 왔다. 사회윤리가 이러하기 때문에 교육의 윤리 또한 경쟁하는 개인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육은 서로 돕고 협력하는 교육보다는 경쟁하여 이기고 승리하는 교육을 가르쳐왔다. 그러나 <서로 연결된 사회>속에서는 나홀로만의 행복이란 있을수 없으며, 이웃의 행복, 자연의 행복이 곧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경쟁사회에서 협력의 사회로
자연계에서 무한히 성장하는 생명은 없다. 모두 정도까지 성장하다 그치고 이후는 무르익고 열매를 맺는 <성숙의 단계>로 넘어간다. 그러나 인간은 무한한 경제성장을 추구한다. 모든 나라가 미국이나 유럽처럼 물질적 풍요를 지향한다. <무한성장주의>는 <무한한 자원채굴주의>를 뜻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구자원은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성장주의교육은 곧 경쟁교육이다. 기후위기는 <성장사회에서 성숙사회로> 변화를 요구하는 메시지이다. 이것은 <경쟁교육>에서 <협력과 서로 살림의 공동체교육>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는 <우분투>,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 온전한 삶”을 추구한 에콰토르의 <수막 카우사이(Sumak Kawsay), 부엔 비비르(Buen Vivir)>의 삶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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