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존재하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채롭게</i>
서울에서 기본소득을 주제로 초청을 받아 사람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배라는 단어는 청년인 나를 수동적이고 피동적이게 만든다. 나는 지원받고 수혜 받아야 할 불쌍한 존재가 아니다. 마을이, 사람들이 나를 먹여 살리는 건 곧 이 마을에, 고양시에 투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다들 나에게 투자해라. 나를 먹여 살려라. 내가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다채롭게 만들어 줄 테니. 이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국민에게 분배하는 게 아니라 투자하는 거다. 국가가 국민에게 투자하라. 그렇다면 국민들이 국가를 더욱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무척이나 호기롭게 이야기를 하였지만 속으로는 얼른 내 동네 고양시로 돌아가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서로 인사를 하고 명함을 주고받느라 정신없는 상황에서 저는 아무도 몰래 비상구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지하철역에 다다랐을 때쯤 핸드폰으로 모르는 번호가 떴습니다.
아이참.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는데 어디 매체의 누구라며 아까 말씀하신 내용이 너무 인상적이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지금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역시 괜히 받았어) 지하철 입구가 보이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그 분과 뻘쭘하게 이야기가 오고갔습니다. 인터뷰나 기사를 쓰려는 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진짜 궁금하여 담당자분을 통해 연락처를 받아 황급하게 연락을 드렸다고. 시간을 뺏은 것 같아 정말 죄송하다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아까 백수라고 하셨잖아요. 경제적으로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 들었는데. 음 이걸 뭐라고 설명드려야 할지 저도 정리가 잘 안되네요. 사실 저는 기본소득이나 이런 사회적 가치에는 정말 하나도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최근 관심있어 하는 부분이 '경제적 불안감'인데 아까 말씀하신 내용들이 너무 당당해보여서 한편으로는 신기했어요. 질문이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도 있겠지만 경제적으로 여건이 좋지 않은데 불안하지는 않으신가요?"
"아. 저도 어찌 답해야할 지 애매하네요. 음...저는 셈이 무척 빠른 편입니다. 지금의 삶의 방식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이 경제적인 불안감과 혼란함보다 상대적으로 크기에 오늘날 백수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저에게는 저만의 계산법이 있고, 지금의 삶이 저에게는 매우 효용이 높은 상태라고 느껴져요.
다만 '어쩔 수 없는' 수동적인 백수라기 보단 능동적으로 '선택한' 백수인 상태라 생각해요. 저는 더 이상 고용당하고 싶지 않아요. 이걸로 내가 힘들게 살았기에 반대로 누군가를 고용하며 살고 싶지도 않고요. 취업과 창업이 아니어도 좀 더 다채로운 방식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은 없을 수도 있지만 삶은 계속 되니까요. 일은 그만둘 수 있지만 당장의 삶은 그만둘 수 없으니까요. 현재 넉넉하지 않지만 낙낙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다고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네. 저는 지금 불안합니다. 몹시. 다만 전에는 불안감과 혼란함을 회피하거나 이러한 기분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면 지금은 뭐랄까? 불안감을 정확히 '직시'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요. '아! 지금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가 아니라 '아. 내가 지금 불안감을 갖고 있구나'라고 할까요? 네. 현재 저는 가난합니다. 그리고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것을 소유하며 살아가기에는 물리적으로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고 싶은 마음도 점점 줄어들고 있고. 최근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말을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왕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소유'하며 살아갈 수 없다면 다채롭게 '존재'하며
사는 것은 어떨까 싶어요.
다양한 상황 속에, 다양한 사람들과 차별 없이 평화롭게 어울리며 존재하고 싶어요. 이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서로 돕고 도와 혼자의 힘으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풍경과 미처 넘볼 수 없는 지경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 곳에 존재하고 싶어요. 내 가족들과 그리고 내 소중한 친구들과. 하나의 방식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내 안의 일면이 아닌 다면을 자각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란 놈이 이런 것도 좋아 하는구나 이런 건 싫어하는구나 하면서.
그래서 현재 제가 매번 자문하는 게 '내 잔고가 지금 얼마지?'가 아닌 '나는 지금 누구랑 있지? 어디에 있지? 무얼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지?' 입니다. 돈 없이 백수로 살면서도 즐겁게 살려면 공부와 학습, 경험을 엄청 많이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요즘 철학, 인문학에 빠져있는데 이 쪽 기본이 '자문자답'이거든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에게 답하고. 자문자답 그리고 자유... 아 질문이 뭐였죠? 아! 저는 지금 겁나 불안합니다. 아주 왕창 불안해요. 하하하하하. 그래서 당장 이 시끄럽고 매캐한 서울에서 벗어나 얼른 동네로 돌아가 친구들을 보고 싶어요. 마을 여기저기서 같이 놀고 싶어요. 또 비록 매일 보지만, 사이가 썩 좋진 않지만 가족들도 보고 싶어요. 존재하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채롭게. 답변이 됐나 모르겠네요.“
그 때 벤치 옆에 앉아 내 장황한 이야기를 받아 적다가 어느 순간 포기한 젊은 청년 한명이 나를 혼란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과연 그 분은 내 말을 공감했을까. 그 분과 헤어지고 나서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내가 했던 말을 계속 되뇌었다. 하아. 백수로 살아가려면 정말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구나. 알아야 하는 것도 많고 참나 백수 되기 거 되게 어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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