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9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요즘 같은 시절에 가을편지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펜으로 편지지에 마음을 옮겨적는 이들은 많지 않다. 내 주변 사람들을 봐도 대부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사연을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식으로 포스팅하고 있다. 거기엔 차마 타인에게 말할 수 없을 듯한 이야기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85년 전 이맘때, 그러니까 1936년 9월에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은 여동생 김옥희에게 쓴 편지를 『중앙』이라는 지면에 기고했다. 지금 이상 시인이 살아있다면 아마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그 편지를 올렸을 것 같다. <동생 옥희 보아라>라는 제목으로 쓴 편지에는 ‘세상 오빠들도 보시오’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애인과 만주로 야반도주한 동생 옥희에게 안부와 격려, 사랑을 전하는 편지글이다. 당시에 젊은 여성이 애인과 야반도주한 것은 집안의 수치라고 여기고 숨길 수도 있었을 텐데 동생에게 “축복한다”하고 “너를 사랑하는 큰오빠가 쓴다”라고 적고 있다. “특히 몸조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같은 가난한 계급은 이 몸뚱이 하나가 유일 최후의 자산이니라. 편지하여라.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 세상은 넓다. 너를 놀라게 할 일도 많겠거니와 또 배울 일도 많으리라.”
이 편지글이 공개되어 동생 옥희가 읽었다면 오빠인 이상에게 답신을 써서 부쳤을까? 자신의 야반도주 행각이 만방에 알려진 점을 부끄러워하며 죽고 싶었을까? 아마도 이역만리에서 살아갈 큰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우리는 글을 쓰며 실존의 고통과 즐거움을 드러낸다. 글쓰기는 일상 전반에 걸친 경험을 직시하게 하며 사회적 현실을 인식하게 한다. 그것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쓰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글쓰기가 주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일기를 쓸 때는 적나라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편지를 쓸 때는 수신자의 마음을 최대한 살피며 쓰려고 애쓴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에서는 그 양상이 천차만별이다. 자신의 요리 실력 자랑하는 반면 자신이 간 식당에 대한 불평이 있고 생일과 결혼을 축하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부고를 전하는 이들도 있다. 개업이나 출판 등 정보가 넘치는가 하면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황도 사소한 구경거리로 공유된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세계 1위이고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는 매순간 어디서나 칼 같은 글이 둥둥 떠다닌다. 편을 가르고 약점이나 치부를 발라내는 무서운 칼. 정치인들의 상호 공격적인 글 말고도 평범한 사람들 간의 뒷담화나 인격살해에 가까운 마녀사냥이 난무하는 현장을 묵도할 수 있다.
나는 얼마 전에 페이스북 친구 두 명이 서로를 비방하고 모욕하는 글을 포스팅한 것을 읽은 적 있다. 누가 봐도 짐작할만한 상대방에 대해 굉장히 직설적이며 공격적으로 쓴 글이었는데, 각자의 페이스북 친구들이 수많은 댓글을 달며 상상 초월하는 인신공격에 동조하며 분노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단말마의 총성이 울리고 칼날이 쏟아지는 듯한 광란의 장이었다.
충격을 주는 글은 감동을 주는 글만큼 소중하다. 날카롭고 정확한 글을 쓰기 위해 치열하게 문장을 갈고 닦는 이들의 노력은 값지다. 글을 쓰는 동안 열정을 갖고 집중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칼로 벤 듯한 글은 마음을 파고들어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그 칼은 타인을 향해 난도질하는 무기가 아니다. 진짜로 글쓰기를 고민하는 자라면 자신을 응시하고 성찰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쓰는 칼 같은 글이 자신의 상처를 집어내되 타인의 환부를 건드리는 데 사용되는 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무심코 쓴 짧은 댓글이 험한 길을 걸어가는 이의 등에 꽂는 단도가 되진 않을지 염려해보아야 한다. 정말로 작정하고 부패한 지배적인 권력을 전복하거나 사회적 정의를 위한 혁명을 꿈꾸며 소셜 미디어에 글을 쓴다고 해도 무고한 한 시민이 공개 처형될 가능성이 있다면 글쓰기를 멈추고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개인적 복수를 하는 이들은 그 방식에 중독된다. 대다수의 관심을 끌며 순간적으로나마 자신이 옹호되고 추켜세워지는 쾌락과 승리감에 도취한다. 그리하여 다시 자판을 두드려 칼을 만든다. 자판을 두드리기 전에 작은 카페에 마주 앉아 오해와 앙금을 풀 수는 없었을까? 서로 노려보다가 웃음을 터트릴 수는 없었을까? 그게 불가능하다고 해도 그토록 비인간적인 결별의 방식을, 언어의 칼로 상대방을 죽이는 길을 택했어야 할까?
며칠 전에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글 중에는 직장 팀장의 뒷담화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분의 유서가 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소셜 미디어 저격 글과 악의적 험담을 쏟아내는 단체대화방의 글이 사망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한다면 그것은 범죄의 공모가 아닐까?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무딘 글보다는 문제를 오리고 도려내는 칼 같은 글이 더 필요한 시절이긴 하다. 하지만 그 칼날은 자신을 겨누어야 한다. 자신의 우울과 슬픔을 오려내고 자신의 굳어버린 마음을 도려내는 칼이어야 한다. 글로써 상대방을 죽이려던 자신의 극악무도함을 찢고 파내려가 자신의 심연 깊숙이 숨는 사랑을 다시 퍼올려야 한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사랑과 포용, 배려의 샘이 있다. 사랑이 있는 정원사는 가지를 치거나 꽃을 자를 때 그 식물 앞에서 아직도 가위 든 손이 떨린다고 한다. 우리가 함께 사과를 먹으려고 타인에게 칼을 건넬 때 칼자루 쪽을 상대방이 쥘 수 있게 하지 않는가. 칼날이 나를 향할 때 사과와 용서의 말이 흘러나온다. “세상의 여러 오빠들에게도 읽히고 싶은” 이상의 편지처럼 우리가 쓰는 소셜 미디어의 모든 글이 편견을 무너뜨리고 사랑을 확장 시키는 편지가 되면 좋겠다. 오늘 저녁 나는 모처럼 연필로 편지를 써야겠다. 설사 받아주길 바라는 사람이 다시금 내동댕이치더라도.


(글) 김이듬 시인 l <책방이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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