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면 뜨끈한 국물이 그립다. 그 국물이 얼큰한 붉은 색이어도 좋고, 개운한 하얀 색이어도 좋다. 숟가락이 다 비치는 투명한 색깔이면 또 어떠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마시듯 떠먹으면 추위는 물론 마음에 남은 찌꺼기까지 날려버릴 수 있다. 그런데 이 국물이 더 맛있으려면 짝꿍이 있어야 한다. 바로 깍두기이다.
깍. 두. 기.
담그는 게 김치만큼 번거롭지 않다. 그런데도 맛있다. 잘 자란 무는 제 몸 속에 이미 단맛을 품어서 그냥 베어 먹어도 달작지근 하다. 거기다 알싸한 맛까지 있으니 개운하기 그지없다. 이런 까닭에 특별한 양념을 넣지 않아도 깍두기는 그저 맛있기만 하다. 그래서 오늘은 깍두기 이야기를 하려 한다. 흔한 깍두기가 아니다. 분홍 깍두기이다.
나는 이런 저런 수업을 한다. 이번에는 ‘엄마표 그림책수업’이라는 건데, 그림책을 읽고 글쓰기도 하고 마음 힐링도 하고 책과 엮어 놀이도 한다. 지난 해 행복학습관에서 했는데, 수업 중 예기치 않은 반응들이 나와 무척 재미있었다. 그 인연으로 올해도 하게 되었다. 코로나19로 계속 미뤄오다가 이제야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올해 수강생들은 지난해와 달리 어르신들이란다. 배워서 손주들에게 써먹을 요량이시라고...^^ 수업을 주관하는 진행자는 조금 미안해 하시며 조심스레 그 말을 내게 전하셨다. 그 동안 이 수업은 어린 아이를 둔 젊은 엄마 아빠들이 주로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호라! 나는 설레었다. 흔쾌히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쉽게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걸 즐기기 때문이다.
첫 수업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며 어르신들이 앉아 계셨다.
“선생님~ 엄마표 그림책이 뭐예요?” 어떤 수업일까 몹시 궁금하시다고.
“글쎄요... 어떤 수업인 것 같으세요?” 나는 지그시 웃고 정확한 답을 드리지 않았다. 나의 첫 수업은 자기를 돌아보는 걸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 짓기를 시작했다. ‘자기’가 짓는 ‘자기 이름’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별명’이 되겠다. 단,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거나 자기가 되고 싶은 것으로 짓는 것이다.

이름을 불러다오
사람의 이름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어진다. 작명가에게 거금을 내고 짓든, 가족들이 짓든, 태어난 아기가 세상의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주길 바라며 큰 뜻을 담아 짓는다. 하지만 사실 그 뜻을 되새기며 그 이름을 부르고 답하며 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름들이 대부분 한자여서 의미 전달이 쉽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돌아보는 첫 순서로 ‘자기 이름 짓기’를 한다. 그 동안 어떤 이름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고, 앞으론 어떤 이름으로 어떻게 불리며 살고 싶은지 정하는 것이다. ‘음...’하며 천장을 바라보는 어르신, 창 밖 허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어르신, 턱을 괴고 고개를 갸웃한 채 골똘히 생각에 빠진 어르신... 다양한 모습들이 나온다. 깊이 몰두하고 있는 그 모습들이 아름답다. 자기 이름을 짓는 숭고한 순간이기 때문이리라.
모르겠어
‘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여지껏 살았는데도 말이야.’
그 때였다. 침묵을 깨고 한 어르신이 혼잣말처럼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자 옆에 있는 어르신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래? 내가 말해 줄까? 난 잘 알겠는데!’
두 분의 대화를 듣다가 나는 갑자기 가슴이 쿵 하고 내려 앉은 걸 느꼈다. ‘아하!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마쳐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는 걸 안다는 일. 그게 바로 철학하는 것이 아니던가! 수업 시간은 중간 즈음에 이르렀지만, 수업 내용은 이미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다. 이 얘길 하며 내가 놀라워하자 어르신들은 ‘참 소박한 사람일세’라는 의미를 담아 웃으셨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이름들이 탄생했다. 그 가운데 내 기억에 남은 것 하나, 그것은 ‘분홍 깍두기’.
지금이 그 때
일 년 사시사철 밥상의 기본 반찬으로 김치가 없을 땐 김치대신으로, 김치가 있을 땐 김치와 나란히 밥상 위에 앉아 미미한 듯 미미하지 않은 듯 존재감을 뽐내는 깍두기. 그 깍두기는 밥상 밖에서도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편을 갈라 놀 때 남는 사람을 조금 기운다 싶은 쪽에 덤으로 보내는데 그 사람을 깍두기라 하지 않는가.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양념처럼 있으면 훨씬 좋은 사람 깍두기.
그 어르신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그런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 그날 수업에서 읽었던 책이 ‘때’라는 그림책이었는데, ‘분홍 깍두기’께서는 지금 ‘이 때가 가장 평화롭다’고 하셨다. 내려 놀 거 내려놨더니 그렇다고...
하얀 도화지에 새로 지은 자기 이름, ‘분홍 깍두기’를 정성스레 쓰시고, 실제로 분홍 깍두기가 한 접시 가득 담긴 그림을 그려주셨다. 그 어떤 화가의 그림보다 내게는 더 훌륭했다. 더 인상적이었다. 수업을 하러 왔지만 사실은 내가 배워가는 게 더 많다.
한 뚝배기 하실래요?
갑자기 추워진 늦가을 저녁. 뜨끈한 뚝배기에 담긴 설렁탕 한 그릇이 먹고 싶어진다. 아삭아삭 씹히는 깍두기 하나 얹어서 볼이 터져라 먹고 싶다. 국물 한 숟가락 남기지 않고 뚝배기 채 들어서 마시다보면 몸의 추위도 마음도 추위도 다 날아갈 것 같다.

(글) 이승희 l 재미있는 느티나무 온가족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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