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
- 영특한 권율동자
- 천화일에 지붕 이은 권율 선생
- 맨발의 권율 장군
- 행주대첩비로 점치기
- 행주대첩비의 충절
- 대첩비각에서 장난치는 권율 장군
- 행주대첩의 공신 장군바위
- 양천강에서 떠내려온 보물상자
- 여성의병 대장 밥할머니
- 권율 장군의 잃어버린 채찍
- 행주치마의 이야기
- 권철 대감과 이항복 집 감나무
- 권율과 신립 장군
- 권율과 세 사위 신립, 이항복, 정충신
- 구인후의 호환 운을 물리친 권율의 비방
- 왕봉(王逢)에서 이루어진 한주의 사랑
- 기감천과 기씨바위
- 공암진에서 빛난 형제의 우애
- 행주참을 대려던 잠꾸러기 서복돌이
- 석빙고 속 못다 한 슬픈 사랑
- 의리에 살고 죽는 물고기 웅어
- 웅어가 된 갈댓잎 배 삯
영특한 권율동자
선조임금 때 일이다. 중국에서 조선 양반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실험해보기로 했다.
사신을 통해 문제를 보냈는데 '큰 뿌시리기(부스러기)', '작은 뿌시리기(부스러기)' 라는 글자를 보이면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한자로 써서 달라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이는 필시 중국이 조선 양반들의 실력을 알아보려는 것일 테니 영의정, 좌의정 등 중신들이 머리를 모으고 답을 찾았다.
그러나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전국에 방을 써 붙이고 답을 아는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이 일로 한 대신이 몹시 걱정이 되어 집에 와서도 주야로 근심하고 식음을 전폐했다.
대신의 어린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근심거리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손자는 문제를 듣는 순간 답을 알았다면서 할아버지께 식사를 하도록 권했다.
할아버지는 반가워서 밥을 맛있게 먹고 그 다음날 손자가 '大鼠稿(큰 쥐)', '小鼠稿(작은 쥐)' 라고 써준 글자를 가지고 입궐하였다. 조정에서 임금과 중국사신 앞에서 할아버지는 말했다.
큰 쥐가 지푸라기 속에서 설치면 '뿌시석 뿌시석'하고 작은 쥐가 설치면 '뽀시락 뽀시락'해서 '大鼠稿', '小鼠稿'라고 쓸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 집 손자가 맞춘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 사신이 손바닥을 치면서 조선에는 대여섯 살 먹은 아이까지도 인재라면서 돌아갔다.
이 아이가 커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의 공을 세운 권율 장군이 되었다.
천화일에 지붕 이은 권율 선생
임진왜란 당시 권율 선생이 천화일(天火日)에 지붕을 잇고 있었다. 천화일은 상량(上樑)을 하거나 지붕을 이으면 반드시 불이 난다는 흉일이었다. 부득이 그날 지붕을 잇게 되면 내려올 때 오줌을 누는 풍습이 있을 정도로 금기시하였다.
마침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천화일에 왜 지붕을 잇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권율 선생이 천화일에 지붕을 이으면 풍신수길을 만난다고 해서 잇는다고 대답했다.
* 천화일(天火日) : 화재가 난다고 하여 꺼리는 흉일. 1ㆍ5ㆍ9월은 자일(子日), 2ㆍ6ㆍ10월은 묘일(卯日), 3ㆍ7ㆍ11월은 오일(午日), 4ㆍ8ㆍ12월은 유일(酉日)
맨발의 권율 장군
선조 때의 어느 날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임금을 뵈러 입궐준비를 하던 권율과 사위인 이항복이 더위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덥습니다. 장인어른께선 더위를 견디기 힘들어 하시니 오늘은 버선을 벗고 맨발로 신을 신는 것이 어떠십니까?” 권율은 풍채가 크고 우람해 더위를 많이 탔다. 그는 사위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워하며 버선을 벗고 신발만 신은 채 대궐로 들어갔다.
그런데 임금 앞에 죽 늘어선 신료들 사이에서 이항복이 불쑥 나오더니 선조에게 한 말씀 아뢰는 것이 아닌가.
“전하, 날씨가 몹시 덥습니다. 이런 무더위 속에서 연로한 신료들이 의관을 갖추고 신발까지 신고 있으면 너무 곤혹스러우니 신발을 벗고 그냥 버선발로 서있게 해주시옵소서.”
선조는 이항복의 말을 기특하게 여겨 노신들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권했다. 모든 신료들이 감사히 생각하며 신발을 벗는데 권율만은 얼굴이 벌게진 채 신발을 벗지 못하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선조가 다시 한 번 권율에게 신발을 벗어도 좋다고 말하자 내관들이 신발을 벗겨주었다. 그러자 신발에서 그만 맨발이 쑥 나오고 마니 늘어선 신료들과 임금 모두 깜짝 놀랐다.
“제가 오늘 무례를 범한 것은 사위 이항복에게 속아 이리 된 것이오니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자초지종을 들은 선조와 대신들은 배꼽을 움켜잡고 웃었다.
행주대첩비로 점치기
<금간 행주대첩비>
행주산성에 있는 행주대첩비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매일 이 비석을 찾아와 하루의 운수를 점쳤다. 비석은 오랜 풍파에 시달려 몸체에 금이 가 있었는데, 그 틈이 좁아지기도 넓어지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틈 사이로 주먹을 넣었다 뺏다하며 운수를 점쳤다. 주먹이 넉넉하게 들어가면 운수가 나쁜 것이고 주먹이 잘 안 들어가면 운수가 보통이며 주먹이 아예 안 들어가야 운수가 좋다는 것이다.
특히 유난히 틈이 크게 벌어지면 마을에 반드시 흉사가 일어났다.
행주대첩비의 충절
언제부터인가 행주대첩비는 옆면에 금이 가더니 일제강점기 때부터는 점점 벌여지기 시작하여 해방될 무렵에 이르러서는 더욱 틈이 커졌다.
그 벌어진 크기가 손 주먹 하나가 들어갔다 나왔다 할 정도여서 그 안에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살기도 했었다는데 해방 이후에는 그 틈이 다시 점점 좁아지기 시작하여 이제는 나뭇가지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다시 아물었다고 한다.
행주대첩비는 권율 장군이 돌아가시고 난 후 부하 장수들이 행주대첩을 기념하고 권율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충신의 혼이 깃들어 영험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대첩비각에서 장난치는 권율 장군
6~7월 밤 12시 정각이면 권율 장군이 말을 타고 나와서 달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어두운 밤에 비각 옆을 지나가면 흙과 모래를 끼얹는다고 한다.
이는 비각 안에서 권율이 장난치는 것이라 한다.
행주대첩비는 권율 장군이 돌아가시고 난 후 부하 장수들이 행주대첩을 기념하고 권율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충신의 혼이 깃들어 영험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행주대첩의 공신 장군바위
<장군바위>
임진왜란 때 덕양산으로 왜군이 쳐들어 왔다. 왜군은 말 탄 3만 명 군사로 조총을 들고 기괴한 가면을 쓰고 커다란 깃발을 휘날리며 기세등등하게 몰려왔다.
이 때 행주산성의 권율 군사는 겨우 2,300명뿐이었다. 그것도 정식 군인도 아니고 의병과 승병, 아녀자들을 모두 모은 숫자였다.
겁에 질린 군사들이 모두 도망가려 하자 부장군이던 조방장 조경 장군이 나섰다. 조경은 군사들을 집합시킨 후 커다란 바위 앞에 섰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그렇지만 내가 이 바위를 손가락 하나로 들어올릴 수 있다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바위를 들어올리지 못하면, 그때 가서 항복해도 되지 않겠느냐?” 하면서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설득시켰다.
바위를 보니 결코 들 수 없는 크기로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군사들이 이에 응하고 조경은 큰 바위를 들어 마침내 엄지손가락 하나로 들어올렸다.
이 때 산성이 떠나갈 듯 함성이 터지고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 혼신을 다한 결사항전을 하게 되어 행주대첩을 이루어냈다.
바위에는 그때의 조경 장군의 엄지손가락 자국이 선명하다. 이 움푹 파인 자국에 엄지손가락을 맞추고 가면 어려운 일이 해결되고 바라는 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 바위는 지금도 덕양산 행주산성 중턱에 있다.
양천강에서 떠내려온 보물상자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잠을 자는 데 꿈속에서 백발노인이 “강에 상자가 떠내려 올 것이다. 그러나 떠내려오는 두 번째 상자는 열지 말아라.” 하는 선몽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로 양천강에 무엇인가 떠내려 왔다. 가까이 보니 커다란 나무상자였다. 꺼내어 열어보니 금은보화가 가득한 보물상자였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양천강에 똑같은 나무상자가 하나 또 떠내려왔다. 부하들이 건져와 권율 장군 앞에 가져오며 모두 열어보자며 신이 났다.
이때 권율 장군은 이를 저지하며 나무상자를 칼로 찌르라고 했다. 명령대로 상자를 치르니 칼 끝에 피가 묻어나왔다.
다시 여러 번 찌른 후 나무상자를 여니 그곳에는 양 손에 비수를 든 왜군 첩자가 죽어 있었다.
여성의병 대장 밥할머니
옛날 한 마을에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지혜로운 여인이 있었다. 집안은 북한산 일대에 농경지가 많았는데, 그녀는 모내기 작법을 활용한 농사 기술을 보급하고 관개를 크게 개선하여 수확량을 높였다.
또 곡식 중 상당 부분은 구휼에 사용했고, 일부는 전란을 예견해 비축하였다. 그러던 중 1592년 마흔아홉 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고양 벽제관 부근에서 왜군과 큰 전투를 벌이다 패하여 퇴각하였고, 왜군은 기세가 올라 창릉천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때 여인은 밤중에 동네 사람들을 이끌고 북한산에 올라가 노적봉을 짚으로 둘러 노적가리처럼 위장하였다.
그리고 창릉천 상류에 석회를 뿌린 뒤 다음 날 함지박을 이고 창릉천으로 갔다.
마침 왜병들이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여인을 보고 물었다.
“물이 이렇게 뿌연 까닭이 무엇이오?”
그러자 여인은 북한산 노적봉을 가리키며, “저곳에 조선군 수만 명이 주둔해 있는데 저 봉우리 같은 것이 바로 조선군이 군량미를 쌓아둔 노적가리라오. 마침 밥을 지을 시간이니 쌀 씻는 물이 흘러 내려오는 것이 아니겠오?” 라고 말한 후 백성들에게도 나누어주는 쌀을 받아오는 길이라며 함지박의 쌀을 보여주곤 총총히 사라졌다.
배고픔과 갈증에 시달리던 왜적들은 앞 다투어 물을 마시고 끌고 왔던 말에게도 물을 먹였다. 얼마 후 이 물을 마신 왜적들은 다들 배탈이 나서 배를 움켜잡고 쓰러졌다. 말들도 모두 탈이 났다.
이때 여인이 급히 조명연합군에게 전갈을 보내 창릉천을 급습하게 했다. 이날 전투 이후 왜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여인은 마을의 여인들을 모아 의병대 상군(裳軍, 치마군대)을 조직해 북한산 일대 전투 때마다 우리 병사들에게 끼니를 제공하고 부상자 치료를 도왔으며 전황 연락책을 맡아 봉화를 올렸다. 여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대장이 되었다.
행주산성 전투에도 참여하여 군사들의 밥을 하고 전쟁에 필요한 물을 끓이고 재주머니를 만들었다. 싸움이 치열해지자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왜군과 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노적봉이 잘 보이는 창릉 모퉁이에 석상을 세워주었다.
동산동 밥할머니 석상이 그것이다. 밥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인조는 밥할머니 를 정경부인으로 봉하고, 남편 문옥형에게는 가선대부 위계를 내렸다.
권율 장군의 잃어버린 채찍
권율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 감사로 있다가 수도 방어를 위해 행주산성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한 가등청정의 군대가 행주산성을 지나게 되었는데 3만 명이나 되었다. 왜군은 이미 두 번이나 권율 장군에게 패한 전력이 있었던 터라 행주산성을 공격할 것이 뻔했다. 당시 권율의 부대는 3천 명도 안됐다.
권율 장군이 가등청정에게 대화를 청하여 만난 자리에서 3만대 3천이 서로 겨룬다는 것은 정정당당하지 못하니 점잖게 그냥 지나가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왜장은 그 요청을 거부했다.
권율 장군이 되돌아오다가 채찍을 놓고 왔다며 전령을 보내 그것을 찾아오도록 하였다. 왜군 진영에서는 채찍을 찾느라 한동안 어수선했고 끝내 찾지 못해 다른 채찍을 가져다주었다.
전령이 채찍을 가지고 돌아와보니 권율 장군의 막사 안에 채찍이 그대로 있었다. 부하들이 모두 의아해했다. 권율은 왜적들이 채찍을 찾느라 잠을 설치도록 계략을 쓴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다음 날 싸움에서 권율 장군이 이겼다. 이것이 행주대첩이다.
행주치마의 이야기
행주대첩 때 일이다.
행주산성에 진을 친 권율 장군 부대는 3만 명이나 되는 왜군과 싸워야만 했다. 조선군은 2,300명으로 관군과 의병, 승군, 아녀자들까지 모두 합한 숫자였다.
그것도 정식 군인이 얼마 없었고 대부분 군사훈련도 하지 않고 무기도 없는 오합지졸들이었다. 전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불리한 실정이었다.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성안의 무기가 다 떨어지고 목책도 무너지고 있었다. 이때 아녀자들이 입고 있던 겉치마를 찢어 다시 걸쳤다.
군사들의 밥을 하고 전쟁에 필요한 물을 끓이고 재주머니를 만드는 일을 하던 아녀자들이었다. 싸움이 치열해지자 성안에 모아두었던 돌을 치마에 싸서 날랐다.
수차석포에 돌을 장전하는 일을 돕기도 하고 성으로 올라오는 왜군을 향하여 돌을 굴려 떨어뜨렸다.
아녀자들은 순식간에 척석군(擲石軍)이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든 아녀자들이 합심하였다.
얼마 후 다행이 2척의 배가 무기를 싣고 한강을 건너와 다시 기세는 반전되었다. 혼신을 다한 결사항전으로 왜군은 대패하고 물러났다.
행주대첩에서 아낙네들의 돌나르기 항전은 유명해졌다.
이후로 아녀자들이 부엌에서 입는 앞치마를 가리켜 행주산성에서 행주대첩 때 입었다는 의미로 그 이름을 행주치마라고 하였다.
권철 대감과 이항복 집 감나무
이항복의 집과 권율의 아버지 권철 대감은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이항복 집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해마다 이항복 집 감나무는 감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그런데 이 감나무 가지가 권철 대감 집으로 넘어가 권철 대감 마당으로 휘어졌다.
권철 대감 댁 하인들은 매년 마당으로 넘어 온 가지에 달린 감을 따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항복이 권철 대감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권철 대감의 사랑방 문에 주먹을 힘껏 밀어넣었다.
문창호지가 크게 찢어지고 이항복의 주먹이 사랑방 안으로 들어갔다.
놀란 권철 대감에게 이항복은 “이 손의 뉘 손이옵니까?” 라고 물었다.
화가 난 권철 대감은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 니 손이지 뉘 손이겠느냐?” 라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이항복이 대답했다. “그런데 왜 대감님 댁 하인들이 우리 집 감나무에서 뻗어나간 감을 마음대로 따 먹게 하십니까?
그리고는 이항복은 공손히 무릎을 꿇고 무례함에 용서를 빌며 매년 불만이던 감나무 이야기를 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권대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다음부터는 하인들에게 명하여 감을 따 먹지 못하게 하였다.
훗날 권율 장군은 이때 이항복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사위로 삼게 되었다.
권율과 신립 장군
권율은 관상을 잘 봐서 신립이 대장이 될 감이라고 여겨 사위로 삼았다. 신립은 자신을 아끼던 권율이 평양감사가 되어 떠나자 찾아뵙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날이 저물자 어느 큰 기와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기를 청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이상하게 처녀가 혼자 살고 있었다. 처녀는 신립을 붙들고 자초지정을 말했다. 밤마다 괴물이 나타나 사람을 하나씩 잡아가서 마을 사람 20명 중 자신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윽고 한밤중이 되었다. 처녀가 말한 대로 괴물들이 소란스럽게 나타났다. 그런데 신립을 보더니 대장님이 오셨다며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머리가 셋인 어마어마한 몸집의 괴물 우두머리가 신립에게 절을 하면서 자신들은 이 집에서 굿을 할 때 희생된 닭들의 원혼이어서 원수를 갚고자 하니 처녀를 달라고 했다. 신립은 괴물들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대신 원혼들에게 바람을 쐬어주고 제사를 지내주겠다고 약속하고 괴물을 내쫓았다. 신립은 기절한 처녀를 구완하고 축문을 써서 닭의 원혼들을 달래는 제사를 지낸 후에 다시 길을 떠나려 하였다. 그러자 처녀가 여기서는 무서워 살 수 없으니 신립에게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자신이 이미 혼인한 몸으로 처가살이를 하고 있으니 첩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였다. 다시 처녀가 그렇다면 종으로라도 데려가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이 부탁마저 거절했다. 이에 낙심한 처녀는 지붕 위에 올라가 떨어져 죽고 말았다. 신립이 평양에 도착하자 권율은 살인을 했냐고 추궁했다. 신립이 사실대로 말하자 권율은 일국의 대장을 할 사람이 일처일첩이 어떻다고 사람을 죽였냐며 신립을 내쫓았다. 신립은 장인에게 박대당한 것을 억울해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 일이 있은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신립이 대장이 되어 문경새재에 진을 치게 되었다. 그때 공중에서 ‘신립아!, 신립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곳에 있으면 패전할 테니 충주 탄금대로 가라.’ 고 알려주었다. 신립은 산신이 도우는 것이라고 여기고 탄금대로 진을 옮겼는데 그곳에서 신립의 군사는 전멸했다. 최후로 혼자 남은 신립이 필사적으로 왜적과 칼로 싸우고 있었는데 공중에서 다시 ‘신립아!, 신립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는 그 순간 목이 똑 떨어졌다.
권율과 세 사위 신립, 이항복, 정충신
권율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권율은 몸집이 크고 얼굴이 얽은 무서운 인상의 젊은이를 데려와 첫째 딸을 시집보냈는데, 그가 신립이다. 어느 날 신립이 사냥을 나갔다가 처녀 혼자 사는 어느 흉가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 시체 사십 여구를 장사지내 주었다. 다음 날 신립이 집을 떠나려고 하자 처녀가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고 했다. 그러나 신립은 자신이 처가에 얹혀살고 있어서 첩을 둘 수 없다며 뿌리지고 가버리자 처녀는 자결해 버렸다. 신립이 집에 돌아오자 권율은 신립에게 악을 쌓았다며 처녀를 구해오라고 했다. 신립이 되돌아갔으나 처녀는 이미 명이 끊어진 후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신립이 문경새재에 진을 쳤으나 백발노인이 세 번이나 나타나 탄금대로 진을 옮기라고 했고, 결국은 패전해서 신립도 죽었다. 보령 승주산에 김장군이라는 쇠도리깨를 잘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신립을 구하러 갔으나 신립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이항복을 사위로 들이기로 한 뒤 권율의 아버지인 권철대감이 이항복의 품행을 알아보기 위해 이항복의 집을 방문하였다. 한창 이야기를 하다가 이항복이 "어르신께선 사람의 겉만 보십니까 아니면 겉과 속을 모두 보려 하십니까? 라고 질문한다. 이에 권철은 “물론 사람의 겉과 속을 모두 보는 게 좋겠지만 어찌 사람의 속을 볼 수 있겠나?” 라고 대답을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항복은 갑자기 허리끈을 풀더니 바지를 확 내려서 자신의 물건을 권철에게 보여주며 당당하게 말을 했다. "제 속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속이 이만하면 매우 훌륭하지 않습니까?" 이에 권철은 이항복의 물건과 대범함에 크게 감탄하고 손녀딸인 권율의 딸과 즉시 혼사를 시켰다. 권율이 전라도 감사 시절 열 살 미만의 정충신이라는 아이가 연락병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전인 아버지와 박색 관비 사이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태어난 아이라고 했다. 아이는 권율이 높은 곳에 올려놓은 담뱃대를 머리를 써서 찾아오거나 첩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적절한 제사(題辭)를 지어주는 등 매우 재치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해서 선조가 의주로 파천해가자 11~12살 되는 정충신이 권율의 장계를 의주까지 전달하는 일을 자원했다. 장계를 조각내서 짚과 함께 섞어 짚신으로 삼아 거지 행세를 하며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무사히 전달했다. 정충신은 이때 오성 이항복 대감의 집에 유숙했는데, 오성이 그 사람됨을 보고 권율에게 권해 세 번째 사위가 되었다.
구인후의 호환 운을 물리친 권율의 비방
권율은 신통력이 있었다. 구인후(具仁垕) 라는 아이가 호환을 당할 상이라는 말을 듣고 부모가 권율의 집에 데리고 갔다. 권율은 구인후를 못생긴 당나귀에 태우고 어느 절로 보내면서 호피를 깔고 앉아 축시가 될 때까지 절대로 내놓지 말라고 했다. 밤이 되자 중이 찾아와 깔고 앉아 있는 호피를 달라고 하였다. 호피는 중으로 둔갑한 호랑이의 것으로 호피를 갖는 순간 호랑이로 변하여 구인후를 해칠 것이었다. 구인후는 권율의 말대로 끝까지 호피를 내놓지 않고 버티었다. 이렇게 호환을 면한 구인후는 후에 사화도 면하고 높은 벼슬에 이르렀다. 구인후는 출세를 해도 비명에 죽을 운수였으나 권율의 비방으로 호환을 물리쳐 운세를 달리한 것이었다. 구인후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벼슬이 효종대에 우의정까지 오르게 되었다.
왕봉(王逢)에서 이루어진 한주의 사랑
고구려의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태자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흥안(興安)이었는데 태자 신분으로 상인 차림을 하고 행주를 몰래 방문하였다. 당시 행주지역은 백제의 영토에 속해 있었고, 행주는 매우 중요한 요새 겸 요충지로 늘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삼국이 서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시절이었다. 한편 행주에는 덕망가인 한(韓) 씨의 딸 ‘주(珠)’ 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처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태자가 행주에서 우연히 한주를 만나게 되는데 첫 눈에 반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자는 백제인의 의심을 받고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다급하게 도망하다 큰 집 담장을 넘었는데, 그 집이 바로 한 씨의 집이었다. 이렇게 흥안은 주를 만났으며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흥안은 고구려 태자라는 신분을 밝히고 곧 떠나야 할 몸이었지만 주와 부부의 언약을 맺었다. 그리고는 “고구려에 돌아가면 다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곳을 점령한 다음 그대를 아내로 맞이하겠노라.” 는 말을 남기로 떠났다. 고구려로 돌아온 태자는 곧 왕위에 올라 고구려의 제22대 왕인 안장왕이 되었다. 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안장왕은 군대를 보내어 여러 번 백제를 침공했지만 계속 패하였다. 이에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하였으나 역시 패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백제 땅에 남은 한주는 그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져 행주를 관할하던 태수로부터 집요한 청혼을 받으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주는 “혼인을 약속한 사람이 따로 있으며 지금은 멀리 있어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하였다. 태수는 몹시 화를 내며 그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주가 대답을 못하자 태수는 “네가 누구라고 사람을 밝히지 못하는 것을 보니 얼마 전 고구려의 첩자가 행주에 나타났었다고 하는데 그 첩자가 아니냐?” 하며 주를 다그쳤다. 한편 안장왕은 이 애통한 소식을 들었다. 주를 구할 묘책을 찾아야만 했다. 다급히 여러 장수들을 불러놓고 “누구든 행주 땅을 정벌하여 한주를 구해내는 사람에게 천금과 만호후(萬戶候)의 상을 줄 것이다.” 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을밀선인이 나섰다. 을밀선인은 군사를 훈련시키던 장수였으며 안장왕의 누이동생인 안학(安鶴)을 사모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자태와 품위를 지닌 안학 역시 을밀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안장왕이 신분의 차이를 들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는 터였다. 이에 을밀이 병을 얻어 두문불출하고 있던 중 안장왕의 이야기를 듣고는 이는 하늘이 준 기회라고 여기며 안장왕에게로 달려갔다. “폐하, 천금과 만호후의 상이 다 무엇입니까? 미천한 신이 원하는 것은 오직 안학 공주와 혼인하는 것뿐입니다. 신이 안학 공주를 흠모하는 것은 곧 폐하께서 한주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안학 공주님과의 혼인을 허락하여 준다면 신은 분골쇄신하여 한주를 구해내겠나이다.” 라고 하였다. 다른 방도가 없던 안장왕은 을밀의 청을 받아들였다. 을밀의 작전은 수군 5천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돌아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가에 위치한 행주성을 급습하는 것이었다. 을밀은 평복에 무기를 감춘 비밀 결사대를 행주성에 잠입시켰다. 거사일은 태수의 생일날이었다. 을밀은 20여 명의 용감한 부하들과 함께 광대놀이패로 변장하여 백제 태수의 생일잔치에 참석했다. 이를 알 일 없던 태수는 한주를 불러놓고 다시 회유하기 시작하였으나 일편단심 한주의 마음은 변할 리 없었다. 태수는 크게 노하여 “저 년을 즉시 처형하라.”고 소리쳤다. 이때 무객(舞客)으로 가장하고 있던 을밀이 칼을 빼어들었다. 그리고는 항복하라 외치며 고구려 군사 10만 대군이 행주에 입성하였다고 외쳤다. 이어 한강에서 대기하고 있던 을밀의 수군 5천 명이 성을 공격하고자 백제군은 참패했다. 아울러 을밀은 고봉산에서 봉화를 올려 육지로 진군해오는 안장왕에게 주가 무사히 구출되었고 행주가 평정되었음을 알렸다. 고봉산에 봉화가 올라오자 안장왕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고구려 접경지대의 백제 고을을 복속시키면서 행주에 도착하여 주와 재회하게 되었다. 이후 주는 안장왕의 왕비가 되었으며 안장왕은 약속한 대로 안학 공주를 을밀 장군에게 시집보냈다. 그리하여 행주는 한주가 왕을 만난 곳으로 왕봉(王逢)이라 하고 이 일대를 왕봉현(王逢縣)이라 칭하게 되었다.
기감천과 기씨바위
<기감천>
행주 기씨(奇氏)의 시조는 덕양산 바위 아래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 바위를 가리켜 기씨바위라 불렀다. 바위에서 태어난 시조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어릴 때 오줌을 눈 자리가 패여 샘물이 솟고 샘터가 되었다. 이것이 기감천으로 물이 달고 좋으며,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마을에 살던 기 씨 사람들이 모두 먹고 살았다.
공암진에서 빛난 형제의 우애
행주산성에서 난지도 쪽 아래 한강변인 공암진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고려 공민왕 때 형제가 나란히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덩이 두 개를 주었다. 두 형제는 이게 웬 횡재냐며 웃으며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가졌다. 얼마 후 공암진에 다다라 함께 배를 탔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아우가 황금덩어리를 꺼내더니 강물에다 던져버렸다. 형이 깜짝 놀라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아우가 대답하기를, “내가 평소 형을 존경하고 사랑하였는데 아까 금을 나누어 갖고 나니 갑자기 형을 시기하는 마음이 생겼소. 이것은 이 좋지 않은 물건 때문이니 그것을 모두 강에다 던져버리고 잊어버리는 것이 낫소.”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형 또한 내심 동생이 없었더라면 하는 마음이 들었던 터였다. 이에 “그래, 너의 말이 참으로 옳구나.” 하며 형도 금덩어리를 꺼내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당시 함께 배를 탄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은 백성들로 그들의 성명과 사는 곳을 묻는 사람이 없었다. 후에 이들 형제가 이억년과 이조년이라고 한다.
행주참을 대려던 잠꾸러기 서복돌이
행주나루에서 서복돌이는 어부인 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복돌이는 가끔 장작을 패서 배로 마포나루에 갖다 팔기도 하였는데, 복돌이는 게으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행주에서 유명한 잠꾸러기였다.
잠이 많아 물고기를 잡다가도 자고, 배 안에서도 자고, 제사를 지내다가도 자고, 밥을 먹다가도 자고, 해가 중천에 떠 있어도 잤다.
하루는 장작을 배에 가득 싣고 나니 마침 썰물이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다음 밀물 때까지 잠깐 눈을 좀 부치려 했는데 깨어보니 다시 썰물이었다. 또 다시 한 잠 더 자다가 깨어보니 또 썰물이었다.
계속 자고나면 썰물이어서 결국 나무를 팔러 가지 못했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잠 많고 게으른 사람에게 “잠 많이 자면 복돌이처럼 된다.” 라고 하였고 누군가 늦잠을 자면 “저 녀석 행주 서복돌인가?”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행주 사람을 보면 놀리기 위해 이봐 “행주 서복돌이 지금도 자는가?” 라는 인사를 하기도 했다.
자식이 이런 저런 핑계로 일이나 공부를 하지 않을 때 부모가 하는 말이 “행주 복돌이 아직도 자느냐?” 라고 하였다.
행주나루는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곳으로 썰물 시에는 매우 작은 배가 아니면 행주 상류 쪽으로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밀물 때 역류하는 바닷물을 타고 바다에서 행주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썰물 때는 행주에서 바다로 나가는 것이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시간에는 강물이 잔잔한 호수로 변해 배를 행주에 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에 한강 유역 및 서해의 뱃사람들에게는 ‘행주참을 댄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석빙고 속 못다 한 슬픈 사랑
300년 전 행주 나루터 앞 돌방구지 마을에 부모를 잃고 혼자 살아가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한강에서 물고기를 잡아다 팔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당시 행주나루 부근 한강에는 조선 팔도에서 유명한 ‘웅어’ 라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어찌나 귀한지 특별히 임금님만 드실 수 있도록 국법으로 정해 놓을 정도였다.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는 돌방구지 동굴 석빙고에 가두어 얼어 죽이는 끔찍한 형벌을 내렸다.
사내아이가 열여섯 살 되던 해 한양에 사는 정 판서라는 사람이 행주나루터 근처에 정자를 짓고 살게 되었다.
셋째 딸이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늘 병치레를 하여 의원이 행주나루에서 요양을 하면 회복될 것이라 권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덕양산에 나무를 하러 갔던 아이가 그 딸과 마주치게 되었고 이내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셋째 딸의 병세는 점점 나빠져 바깥출입조차 하기 힘들어졌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이는 슬픔에 빠졌다.
두 사람의 딱한 이야기는 고봉산 만경사의 주지스님에게까지 전해졌다. 이를 불쌍히 여긴 주지스님이 어느 날 찾아와 셋째 딸의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 방법은 웅어를 잡아 먹이는 것이었다. 아이는 약수로 깨끗이 몸을 닦고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나갔다.
그때 강 가운데 물결이 잔잔해지더니 커다란 웅어 한 마리가 튀어올라 배 위에 떨어졌다. 쉽게 웅어를 잡고 기뻐하는데 웅어 입 속에 쪽지가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이 웅어로 정 판서 딸을 구하게 되겠으나 너는 국법을 어기고 웅어를 잡았으니 스스로 석빙고에 들어가는 벌을 받아야 한다’ 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벌을 달게 받기로 하였다.
아이는 웅어를 정 판서에게 가져다주고 돌아와 석빙고 속으로 들어가 큰 얼음이 되고 말았다.
몸을 회복한 셋째 딸이 자신을 살린 아이를 찾아갔지만 이미 석빙고 속에 얼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셋째 딸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슬픈 나날을 보냈다. 얼마 후 셋째 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후 돌방구지 석빙고 속에 또 하나의 얼음이 생겨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또 어떤 사람은 해질 무렵 두 남녀가 두 마리의 웅어가 되어 무지개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고도 했다.
의리에 살고 죽는 물고기 웅어
옛날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660)은 평소 웅어를 즐겨 먹었다.
그러다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에게 백제가 함락하고 멸망하였다. 이후 소정방은 옛날 백제의 왕이 즐겨 먹었다는 웅어 맛이 궁금해져 웅어를 잡아오라고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웅어들은 잡히지 않았다. 적장의 먹거리가 될 수 없다고 웅어들은 잡으려는 뱃전에 머리를 부딪혀 모두 죽었다고 한다.
웅어는 산 채로 잡아야 제 맛인데 도대체 살아 있는 웅어는 잡을 수 없었다.
이후 웅어들은 옛 임금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모두 백제 지역에서 도망갔다고 한다. 이에 의리 있는 물고기라고 하여 그 이름이 의어(義魚)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이후 웅어는 왕이 살던 곳을 그리워 한다는 전설을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임금이 사는 궁궐이 가까운 행주가 웅어 명산지로 유명해진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웅어가 된 갈댓잎 배 삯
옛날 어느 노스님이 강을 건너려 나룻배를 탔다.
강을 다 건넜는데, 배 삯이 없던 스님은 도포주머니에서 갈댓잎을 몇 개 꺼내 주었다. 이에 사공이 돈으로 알고 받고 보니 갈댓잎이었다.
사공은 어이없어 강물에 갈댓잎을 던져버렸다.
그랬더니 그 갈댓잎들이 물고기가 되어 헤엄쳐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게 바로 웅어였다. 사공은 비싸게 받은 배 삯을 강에 버린 것이었다.
최종수정일 : 2018-12-14 20: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