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해설스토리

행주산성 안내도

01. 매표소 입구

행주산성

안녕하세요? 행주산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행주산성을 관람하기 전에 잠깐 여기 안내도를 먼저 보고 가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 계신 위치는 바로 이곳입니다. 행주산성은 해발 124.9m인 덕양산 안에 있습니다. 오늘 나지막한 산을 하나 올라가실 텐데요, 소요 시간은 보통 1시간 정도 걸리나 곳곳을 꼼꼼히 관람하시고자 하면 2시간 이상 걸리는 코스입니다. 오늘은 2시간 이상 코스로 깨알 같은 행주산성 스토리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관람 경로는 여기 대첩문을 들어가서 권율 장군 동상을 지나 충훈정, 충장사, 대첩기념관, 진강정, 덕양정, 행주대첩 초건비를 지나 행주대첩비 정상에 오른 후 충의정을 관람하시고 토성으로 내려오는 코스입니다.

02. 대첩문 - 행주산성 주 출입문

대첩문

이곳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을 기념하는 장소로 오늘 보시는 대부분의 시설물들은 1970년 국토정화보수작업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이 대첩문도 그때 세워졌는데요 정면 3칸, 측면 2칸, 높이는 4.7m이며 평삼문 구조의 콘크리트 건물로 ‘대첩문’이라는 현판을 달았습니다. 당시 행주내동 부락을 끼고 올라가는 길을 폐쇄하고 1,000여 평의 광장을 성토하여 만든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저기 문 위에 홍살문도 있고요 문이 세 개입니다. 삼문 형태로 평소에는 이 문으로만 통행하지만 이 세 문이 모두 열리는 날이 있습니다. 행주대첩제나 행주문화제, 해맞이 등 축제행사 때는 모두 열어둔답니다.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권율 장군의 동상이 보이시죠? 그리고 저기 왼편에 있는 건물은 고양시 문화관광해설사 사무실입니다. 바로 저곳에서 문화관광해설사가 대기하고 있다가 관람객이 해설요청을 하시면 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무료해설입니다. 일단 동상 설명은 잠시 아껴두고 여기 오른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03. 충훈정(忠勳亭) - 행주산성 국궁장

충훈정(忠勳亭) - 행주산성 국궁장

이 길은 상수리나무가 많아 여름에 시원합니다. 저기 보이는 정자가 충훈정입니다. 1986년에 건립되었으며 호국의 의미로 이름을 붙인 충훈정은 옛무기이기도 했던 각궁의 연습장입니다. 지금은 국궁장, 혹은 활터로도 부릅니다. 충훈정의 현판 글씨는 권율 장군의 후손인 권이혁(權彛赫)이 썼으며, 건물 규모는 2층 누각으로 팔짝지붕에 정면 5칸, 측면 5칸이며 콘크리트 구조입니다. 충훈정 활터의 규모는 사대가 21개이고 과녁은 3개이며 여기서 과녁까지 거리는 145m로 표준규격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평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국궁연습은 하지 않습니다. 매년 개최되는 행주대첩제와 행주문화제 등의 특수한 행사 때만 궁도대회를 개최합니다. 그날이면 이 활터에 내로라하는 궁도인들이 몰려와 실력을 겨루며 저기 과녁을 향해서 시위를 당기는 거죠. 일반인들을 위한 국궁체험은 별도 공간을 마련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5월에서 10월까지 주말에만 운영하는 국궁체험장입니다. 간단한 활쏘기 요령을 배우고 실제 체험을 하는데 어른을 동반한 어린이도 가능합니다. 과녁이 2개 있고, 또 저기 계단 옆에서는 덤으로 제기차기, 팽이돌리기 등 민속놀이도 즐길 수 있어서, 이 체험마당은 소문이나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답니다. 그럼 국궁 체험은 다음 기회에 하시구요 다시 왔던 길을 돌아나가 권율 장군님을 뵈러 갈까요?

04. 권율 장군 동상-권율 장군과 행주대첩

권율장군 동상

이제 권율 장군 동상 앞으로 갑니다. 저기 보이는 깃발은 군령기라고 하는데 군대에서 명령을 알리는 깃발로 행주산성이 군사지역이었음을 상징하는 깃발들입니다. 6기가 꽂혀 있지요? 순찰을 알리는 순시기(巡視旗), 명령을 전하는 영자기(令字旗) 등 깃발의 기능은 다른데 모두 오방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답니다. 맨 앞의 깃발만 순시기이고 나머지는 모두 영자기인데 영자기도 어떤 색이냐에 따라 명령 내용이 달랐답니다. 이곳 행주산성에서는 저런 깃발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뒤에서 동상을 호위하듯이 서 있는 소나무는 반송이라고 합니다. 마치 그 모양이 소반을 엎어놓은 듯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소나무 가지가 많아서 천지송, 만지송이라고도 부르곤 한답니다. 이 반송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저기 서서 한결같이 권율 장군님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권율 장군님 동상 앞입니다. 이 동상은 한국 근대조각가 김세중 선생의 작품입니다. 김세중 조각가는 서울대 조각과 1회 졸업생으로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의 미술행정의 일선에서도 뛰어난 활동을 하신 근대조각가입니다. 한국조각의 기수라고 불리며 광화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유엔참전기념탑, 유관순 동상 등 많은 기념 조각작품을 남겼습니다. 권율 장군 동상은 1986년에 건립되었으며 높이는 5m, 좌대높이 3.35m가 되니 총 높이는 8m가 넘습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권율 장군과 행주대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권율 장군은 1537년(중종32년)에 영의정이던 권철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여섯 살 때 아무도 해독하지 못하던 중국사신이 준 문자를 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큰 인물이 될 아이라는 기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 시호는 충장(忠壯)이고 사별하여 두 번 결혼하였으나 슬하에 딸 하나만 두었는데 사위는 그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입니다. 성품은 명문가의 아들이었으나 자만하지 않고 사람을 대함에 성심을 다하였으며, 기골이 장대한 팔척장신의 용모로 풍채와 행실이 모두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어릴 때 영특했던 영의정의 아들임에도 마흔 살이 넘을 때까지 과거를 보지 않아 집안의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이때 권율 장군은 당시 양반 자제들처럼 과거시험 공부로 책상에만 앉아 있지 않고 전국을 누비며 조선의 산천과 강을 살피어 관방시설과 지세를 익히는 산 공부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 덕에 임진왜란 때 그의 숨은 지혜는 놀랍게 발휘됩니다.

권율 장군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마친 뒤 늦은 나이 46세 때 과거시험을 처음 봅니다. 물론 합격합니다.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의주목사로 있다가 임진왜란이 난 후 나주목사에서 다시 광주목사가 되어 ‘늑대와 독사 같은 왜적을 소탕하여 나라를 구하자!’는 비장한 격문을 발표하고 1,500명의 의병을 모집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맹활약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치대첩과 독산성 전투를 통하여 일본군을 물리친 후 행주산성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한편 왜군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 부대와 합세한 조·명연합군에게 평양성에서 대패하였으나 이후 벽제관 전투에서는 이기게 됩니다. 왜군들은 그 기세를 몰아 권율부대가 주둔한 행주산성으로 몰려옵니다. 이미 이치와 독산성에서 패한 경험이 있던 왜군은 권율 장군을 반드시 잡아 패배한 치욕을 씻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처음 권율 장군은 아현동 고개쯤에 진을 치려했으나 부하장수 조방장 조경이 행주산성에 진을 칠 것을 권하고 이를 받아들여 양천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이곳으로 건너왔습니다. 산성에 들어온 권율부대는 이중으로 목책을 만들고 전투에 만전을 가하였습니다. 마침내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 왜군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왜군은 당시 3만 명이나 되었으며 말을 타고 조총을 들고 기괴한 가면을 쓰고 깃발을 휘날리며 몰려왔습니다. 기세등등한 위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우리 병력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때의 우리 병력은 겨우 2,300명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두 정식 군인도 아닌 관군, 의병, 승군, 여성을 모두 합한 숫자입니다. 3만 명 대 2,300명! 누가 봐도 이 전투는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전투였습니다. 3만 명의 왜군은 7진으로 나누어 공격해 왔습니다. 첫 공격은 제1대장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한 조총부대였습니다. 이때 우리 군사들은 혼신을 다하여 이를 막아냈습니다. 연이어 2차, 3차 공격에도 패하자 보다 못한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가 나섰으나 결국 우키다 히데이에를 포함하여 4명의 대장들이 부상을 당하고 저녁 6시가 되자 왜군은 물러납니다. 왜군의 공격은 1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참패로 끝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행주대첩으로 조선군이 12배도 넘는 적을 물리친 기적적인 승리였던 것입니다. 행주대첩의 가장 큰 의미는 이 싸움 이후 왜군의 전세가 완전히 꺾이고 명나라 군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한성을 되찾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람 앞에 등불 같았던 상황에서 바람이 자자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당시 그 용감했던 2,300명의 병력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동상 뒤의 이 동판 부조물이 자랑스러운 우리 군사들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조 그림 관군은 나라에 소속되어 있던 정규군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현직군인입니다. 관군은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화살, 궁시, 칼 등의 무기를 사용하였습니다. 관군들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화살을 쏘았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화살을 아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 이 그림에서 권율 장군님을 찾아볼까요? 저 위에 계시네요. 장군님의 호령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나요? 저기 신기전의 모습도 보이네요. 그 유명한 신기전에 대한 소개는 대첩기념관에서 하는 걸로 하구요 옆 부조물인 의병들을 보겠습니다. 의병은 나라가 위급할 때 백성들 스스로 자원해서 조직된 군대입니다. 평소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던 사람들로 전투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보세요. 무기로 쓰인 농기구가 보이죠? 도끼, 낫, 삼지창, 죽창 등을 무기로 들고 나와 나라를 구하고자 뭉쳤습니다. 당시 얼마나 나라가 긴급한 상황이었는지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번에는 이쪽 승군의 장면을 볼까요? 저기 가운데 염주를 걸고 계신 분이 승장 처영 스님입니다. 당시 승군들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해냅니다. 사명대사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승군부대가 결성되고 전투에 있어서도 맹활약을 합니다. 행주대첩 때에는 특히 위험한 지역을 맡아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무기가 부족해 재주머니를 만들어 던지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기 여성부대는 부상병을 치료하고 밥을 해주러 왔다가 전사가 된 경우입니다. 행주대첩에서 어쩌면 가장 유명한 부대인지도 모르겠네요. 행주치마 전설을 만들어낸 부대이니 말입니다. 전투가 위급해지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를 잘라 겉치마로 걸치고 돌을 날라주어 수차석포 발사나 성안에서 돌을 굴려 올라오는 왜군을 막는 투석전을 펼쳤습니다. 그때 동산동 밥할머니가 이 여성부대의 의병장이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각기 다른 네 부류의 병력이 나라를 구하고자 혼신을 다함으로써 행주대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다음 장소인 권율 장군의 사당 충장사로 이동하겠습니다.

05. 충장사 -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충장사

이제부터 오르막길인데요, 이 길은 덕양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주 산책로입니다. 봄이면 왼편에는 꽃분홍 철쭉과 살구나무가 오른편에는 노란 개나리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하는 길입니다. 천천히 함께 올라가겠습니다. 길을 반으로 나누어 왼쪽 바닥에만 도색을 하고 오른쪽 바닥에는 군데군데 그려진 그림이 있지요? 이 길은 2011년에 산성을 보수하면서 새롭게 단장한 길입니다. 콘크리트에 컬러를 입히는 윈터스톤이라는 재료로 대첩기념관으로 가는 갈림길까지 도색한 후 무기그림 16점과 행주산성 해돋이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이 그림의 무기 이름이 궁금하지요? 그 이름과 용도는 대첩기념관에 가면 알 수 있습니다. 잘 기억해 두셨다가 한 번 찾아보세요. 이 그림들은 과거 행주대첩의 활약을 보여주며 행주산성의 역사적 의미를 상징하고 있답니다.

아! 잠깐, 왼편으로 들어갔다가 갈까요? 이곳은 잔디광장이라 부르며 잔디밭이 잘 꾸며져 있는 휴식공간입니다. 이 쉼터는 2007년에 만들어졌는데, 단체 관람객이 점점 많아져 쉴 곳을 더 마련한 것입니다. 특히 이 장소는 봄가을에 현장학습 나온 초등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거나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이 꽤 넓어서 2~3개 학교팀이 몰려와도 거뜬히 이용이 가능하답니다. 또 넓은 평상 형태의 나무 그늘막도 있어 햇볕도 피하고 시원한 바람도 쐴 수 있어 현장학습 철에는 자리 경쟁이 치열합니다. 봄철에는 덤으로 평상 뒤의 벚나무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꽃잎을 휘날려 기가 막힌 장관을 이룬답니다. 때를 잘 맞춰오시면 봄날 꽃잔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저쪽에 보이는 것은 투호놀이 체험장입니다. 투호놀이는 우리 옛 민속놀이의 하나로 특별한 행사 때에만 실시하던 것을 몇 년 전부터는 이곳에서 항상 즐길 수 있도록 설치하였습니다. 한번 화살을 던져 넣어 볼까요?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간혹 지나다 보면 화살을 제 자리에 꽂아두는 것을 잊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놀이 후 가지런하게 화살을 꽂아두고 가는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자, 이제 투호던지기는 다음에 더 하시기로 하고, 이동합니다.
여기 권율 장군과 동산동 밥할머니 안내판이 있습니다. 밥할머니는 임진왜란 당시 고양지역에 실존하는 문 씨 집안 며느리로 이 지역의 여성들을 모아 여성의병으로 활동한 인물입니다. 행주대첩에도 참여하였는데, 부상병을 치료하고 병사들에게 밥을 지어주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밥보시도 많이 하여 밥할머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러한 밥할머니의 전설은 고양시 동산동의 밥할머니 동상과 함께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곳은 야외 사진 전시장입니다. 고양시와 행주산성의 사계를 보여주는 사진 40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수 코팅 처리를 하였지만 아무래도 햇볕에 색이 조금 바랜 경우도 있네요. 이 사진들은 여기서 고양시 홍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벤치도 많이 있으니 쉬어가도 되겠지요? 그리고 저기에 보이는 건물은 산불진화 장비를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특히 행주산성은 경기도 사적 제56호로 지정된 문화재 지역으로 산불예방에 만전을 가하고 있습니다. 자나 깨나 불조심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명심할 명언으로 문화재지역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제 다시 주 산책로로 나가겠습니다. 조금 올라갑니다.
양쪽에 심어진 가로수는 살구나무입니다. 옛부터 이곳은 살구나무가 많았던 동네랍니다. 그래서 행주라는 이름에 살구나무 ‘행(杏)’자를 썼구요. 물론 지금은 다행 ‘행(幸)’자를 쓰고 있지만 옛 이름의 의미를 살려서 십여 년 전 이곳 주 산책로에 살구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답니다. 그때 조그만 나무를 줄지어 심었는데 벌써 키가 이렇게 컸네요.

여기서 세 갈래 길을 만났네요. 이정표가 잘 설명해주고 있지요? 왼쪽 길은 토성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가운데 길은 주 산책로이며 오른쪽 길은 충장사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충장사로 갑니다.
충장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문이 있습니다. 문인데 문짝이 없으니 문인 듯 문이 아닌 이 문을 가리켜 홍살문이라고 합니다.
그 명칭은 붉은 색이며 꼭대기에는 화살 모양의 살을 꽂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홍살문은 사당뿐만 아니라 왕릉, 향교, 서원 등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문은 참배하는 사람들에게 ‘여기서 부터는 신성한 곳이다.’ 라는 의미로 경건한 마음을 권하는 경계의 표식입니다. 그런데 저기 꼭대기 가운데를 자세히 보세요. 저건 무슨 모양일까요? 대부분의 홍살문의 문양은 삼태극 모양인데 이곳은 좀 다릅니다. 바로 도깨비상, 귀면이라고도 하는데요. 어때요 무서워 보이나요? 무섭기보다는 좀 귀엽지 않나요? 귀면은 나쁜 잡기를 못 오게 막는 역할을 합니다. 붉은 색도 부정한 기운을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고 하지요? 부적을 붉은 색으로 쓰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홍살문은 붉은 색과 귀면과 화살모양 모두가 악귀를 몰아내기 위하여 총력을 다 하고 있으니 충장사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입니다.
홍살문 입구 오른쪽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용하던 군령기 6기를 꽂아두고 무궁화를 심어 행주산성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이곳은 민족의 성지라는 역사적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제 행주산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걸어 볼까요?
이 바닥에 예사롭지 않게 그려진 이 세 갈래 길은 무엇일까요? 이는 삼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신성한 곳으로 가는 길은 함부로 걷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삼도는 삼문과도 같은 의미를 갖는데 삼문에 대하여는 충장사 앞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 길에는 가운데 길은 밟지 않으며 오른쪽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말없는 규칙이 그려져 있답니다. 우리도 이 규칙에 따라 걸어 볼까요?
약간 오르막인 이 길은 올라갈 때는 단풍나무가 잘 보이고 내려올 때는 붉은 소나무가 잘 보이는 신기한 나무터널입니다. 가을이면 멋진 단풍이 마치 조명을 밝힌 듯이 물드는 곳입니다. 짧은 거리지만 이곳만 걸어도 가을의 단풍놀이는 만족하실 것입니다. 벌써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물들기 시작하네요. 머지않아 그 멋진 풍경이 펼쳐질 텐데요. 불타는 것처럼 새빨갛게 물든 100m 정도의 이 단풍나무 숲길을 한번이라도 걸어 본다면 두고두고 잊지 못할 행복하고 멋진 추억이 될 것입니다. 그때 꼭 한번 다시 오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 다 같이 함께 숨을 크게 들이쉬고 솔솔 피어나는 솔향기를 맡으며 오른쪽으로 경건하게 들어가겠습니다.

저기 멋진 충장사 모습이 등장하네요. 그런데 오른쪽 아래에도 건물이 하나 있지요? 저 건물은 1987년 건립된 전사청입니다. 전사청은 충장사 제전행사 때 제전행사 용품인 제기와 의관을 보관하는 장소랍니다. 출입을 금하는 곳이니 굳이 들어가지는 마세요.

충장사는 권율 장군의 사당으로 1970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사당 명칭은 권율 장군의 시호인 ‘충장공’을 따른 것입니다. 권율 장군의 사당은 사실 이보다 훨씬 전 조선시대 헌종 시절 1842년에 기공사라는 이름으로 지어졌었습니다. 행주대첩 이후 250여 년 만에 헌종임금이 권율 장군의 공을 새롭게 깨닫고 커다란 비석도 다시 세워주고, 사당도 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때의 기공사는 지금 이 위치가 아니고 행주나루 부근이었는데, 위치가 강가에 있다 보니 홍수로 여러 차례 무너지고 다시 복원을 거듭하다가 한국전쟁 때 완전히 불타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이에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토정화사업의 하나로 행주산성 재정비사업을 실행하면서 행주산성에 행주대첩을 상징하는 시설물들을 건립하고 이 자리에 사당도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행주 나루터에 사당을 복원하려 했으나 행주산성과는 거리가 있어 국민들이 참배하기 어렵다 하여 산성 내에 세웠다고 합니다. 이후 기공사이던 행주서원도 다시 복원되어 현재는 행주외동에 있는 행주서원에서도 권율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서원은 처음에 권율 장군의 위패만 모셨으나 지금은 행주대첩 당시 공훈을 세운 6분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장사는 권율 장군 한 분만 모시고 있습니다. 제전일은 행주대첩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한 3월 14일이며 이 날 행사를 행주대첩제라고 합니다. 제례의 초헌관은 고양시장이 아헌관은 고양시의회의장, 종헌관은 고양문화원장이 맡아 진행합니다. 또한 해마다 열리는 행주문화제 때도 이곳에서 고유제를 올립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시설물을 살펴볼까요? 여기 이 한글로 된 비석은 행주산성 보수정화 기념비인데 충장사를 설립하게 된 동기와 행주대첩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글은 이은상 선생이 짓고 서희환 선생이 글씨를 썼습니다.

이제 사당을 바라보실까요? 사당의 문이 3개이지요? 3개의 문이 있어 삼문이라 부르는데 중앙의 문은 신문(神門)이라 하여 제전을 드리는 행주대첩제와 행주문화제 때만 열립니다. 나머지 문은 항상 열어두고 있으며 참배객은 오른쪽으로 들어가고 왼쪽으로 나오는 것이 삼문의 규칙입니다. 충장사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본 삼도처럼 삼문도 그런 의미입니다. 사당의 건물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마루와 기와를 제외하고는 전부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현판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쓰셨습니다. 이제 삼문을 통과하여 충장사로 올라가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합보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합보는 우리 조상들이 중요한 예식을 치룰 때 걷는 방식인데요. 계단을 오를 때 이렇게 한 발씩 걷는 게 아니라, 한발 디딘 후 나머지 한 발을 모아 두 발 상태를 유지하고 다시 걷는 방식입니다. 이 때 올라갈 때는 오른발을 먼저 딛고 왼발을 오른발 옆에 모으고, 내려오실 때는 왼발을 먼저 딛습니다. 자,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이런 걸음은 조심스런 걸음으로 참배하고자 하는 분에 대한 겸허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준비하는 태도입니다. 좀 시간은 걸리지만 옛 방식으로 가보겠습니다.

이제 권율 장군님 앞에 왔습니다. 권율 장군님 모습은 어떠신지요? 상상했던 그대로 인가요? 영정은 장우성 화백의 그림입니다. 장우성 화백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서울대 미대 교수도 역임하신 근현대 동양화단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영정그림으로도 유명한데 이순신, 김유신, 윤봉길 등의 애국지사들의 초상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향을 사르고 참배하겠습니다. 다 끝나셨으면 왼쪽으로 조금 이동해 볼까요. 저기 잔디밭에 네모난 저것은 무엇일까요? 망료위(望燎位)라고 합니다. 망료위는 제향을 지내고 난 뒤 축문을 태운 후 재를 경건하게 묻는 장소랍니다. 제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절차가 있어서 이를 지키며 경건하게 진행된답니다.

내려가기 전에 여기서 사당 전경을 한번 살펴볼까요? 사당처마 끝에 닿을 듯 제일 가까이 양 옆으로 심어진 이 두 그루 나무는 백목련입니다. 이른 봄이면 탐스러운 꽃을 피워 사당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저 아래 사당 뜰 오른편 중앙에 있는 나무는 배롱나무입니다. 원래는 양쪽에 두 그루가 있었는데 왼편 나무가 고사하고 지금은 한 그루뿐입니다. 저 배롱나무는 목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늦여름까지 꽃분홍 꽃을 피워 산성에서 가장 오랫동안 꽃을 보여주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저기 담장 끝 양쪽에 백송이 한 그루씩 심어져 있습니다. 백송은 고양시 상징 나무입니다. 그럼 고양시 상징 꽃은 무엇일까요? 예, 이곳에서는 볼 수 없지만 장미랍니다.

이제 오른쪽 계단으로 사당을 내려가겠습니다. 물론 내려갈 때도 합보를 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가야할 곳이 너무 많으니 서둘러야 하거든요. 삼문을 나오니 저 맞은편에 은행나무가 보이지요? 향교나 서원, 사당 앞에 은행나무를 심는 것은 그곳에 모셔진 훌륭한 분을 닮은 인재가 주렁주렁 열리는 은행처럼 많이 배출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저 은행나무도 가을이면 단풍나무와 어울려 환상적인 풍경을 이룹니다. 늦가을에는 그 아래 노란색과 빨간색의 꽃융단이 꿈길처럼 깔린답니다.

이제 충장사를 나와서 다시 내려가겠습니다. 소나무의 멋들어지게 굽어진 자태는 내려갈 때 더욱 눈에 띕니다.

06. 대첩기념관 - 행주대첩의 전황과 무기 전시관

대첩기념관

이제 대첩기념관으로 갑니다. 저기 왼쪽에 예사롭지 않은 큰 바위가 보이지요? 가까이 가 보겠습니다. 이 바위를 가리켜 장군바위라고 합니다. 바위에 무슨 이름이 있냐구요? 여기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행주대첩 당시 권율 장군은 정상에서, 그리고 조경장군은 이 근처에서 군사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3만의 왜군이 몰려오자 군사들이 당황하여 도망가는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권율 장군은 칼을 빼들고 도망가는 군사의 목을 치며 독려하셨고 이곳을 지키던 9척 장신의 조경장군은 싸움을 피하려는 군사들을 설득합니다. 지금 우리는 싸움에서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기적이 있는 법, 내가 만약 이 바위를 손가락 하나로 들어 올린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함께 싸워보지 않겠느냐? 라고 물으니 군사들이 바위를 보아하니 결코 들어올릴 수 없는 크기였습니다. 군사들은 이에 응하자 조경장군은 바위를 번쩍 들더니 마침내 엄지손가락 하나로 들어 올렸습니다. 이때 와~ 하는 함성과 함께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져 대첩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믿을 수 없다고요? 자, 그럼 여기 푹 파인 엄지손가락 자국을 보세요. 이를 증명하는 증표랍니다. 이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는 모든 일에 있어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어떤 어려운 결정이나 소원이 있다면 여기 엄지손가락 자국에 내 엄지손가락을 맞춰서 힘을 얻어가세요.

최종수정일 : 2024-11-12 16: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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